2011 후지산(2011.8.04~05) 여행 이야기

모든 준비를 마치고 6시 30분에 집을 나왔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후지산 고고메 행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태반이 서양인들이었다.
3월의 지진 때문에 해외 관광객들이 많이 줄었을 텐데 그럼에도 후지산은 매력적인 장소인 것 같다.
시간이 되어 버스 두대가 정류장에 들어섰고 나는 뒤따라 들어온 임시편에 올라탔다. 버스 안은 반 쯤 비어있었고 내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창밖은 캄캄하고 별로 볼 것도 없었기 때문에 가는 동안 아이팟으로 노래나 듣고 있었다.

출발하고 한시간이나 지났나...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망했다...' 뭐 비옷이며 우산 같은걸 챙기긴 했지만 이번 산행은 처음부터 비가 안 온다는 것을 전제하고 계획한 것이기 때문에 시작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기우였던지 다행히 얼마 안가서 비는 그쳤고, 버스는 후지큐 하이랜드를 지나 후지산 고고메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 앞의 등산용품 & 기념품 가게에서 1100엔을 주고 산소캔을 구입했다. 솔직히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등산 기념으로.





신주쿠에서 버스 기다리는 중.




고고메 도착.




 캔에도 '등산 기념' 이라고 써있음;




화장실 쓰는데 돈을 받는다. 여기서는 50엔이지만 정상에선 300엔!! 동전을 많이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짐을 다시 한번 추스리고 가져온 옷을 껴 입었다. 신주쿠는 헉소리나게 더웠지만 해발 2400미터에 있는 이곳은 8월에도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다. 머리에 라이트를 두르고 스틱을 꺼내 들고 등산로 입구를 찾아갔다.
야간등반에 헤드랜턴이 필수라고 하는데,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일단 등산로에 들어서면 조명 따윈 하나도 업ㅂ기 때문에 라이트가 없으면 한발짝도 못나간다. 깝죽대다 어디서 실족이라도 했다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시체가 될지도 모른다.

다른 분들이 다녀온 후지산 후기들을 보면 등반 도중에 함께 오르던 외국인들과 자연스레 친해져서 뭔가 글로벌한 추억을 남기고들 오시던데, 나도 나름 그런걸 기대해 보았지만 역시 인상이 더러워서 그런가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몇몇 외국인 일행들 앞에서 얼쩡대 봤는데 이 친구들은 너무 느려서 중턱에서 날 샐 것 같았기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혼자만의 길을 나섰다.
안습..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눈 앞은 안개가 자욱하고 뭔가 가습기처럼 물가루같은 걸로 가득 차 있었다.
산이 높다보니 별 신기한 현상도 다 있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물가루가 바로 비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옷이 다 젖고 난 뒤였다..

투덜대며 뒤늦게 우비를 꺼내입고 다시 등반을 계속했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 보니 어디서 단체로 등산을 왔는지 한무리의 사람들이 등산로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내가 정말 혐오해 마지않는 행위인 길막을 한두명도 아닌 수십명이 동시에 시전하고 있는 상황.. 어두컴컴한 바위길 위에 줄지어 랜턴만 밝히고 올라가는 모습이 꼭 본 석스 엔 하모니의 'Tha Crossroads'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같다. 성질 급한 몇몇은 대열에서 벗어나 그들을 앞질러 올라가기 시작했고 나도 그쪽으로 합류했다.





등산로 입구에서. 플래시 안 터뜨리면 하나도 안보임.




사람 없으면 진짜 무섭다.




올라가는 도중에 이런 산장이 있는데 숙박 외에도 여러가지 음식과 생필품등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무지 비싸다.




이런 길을 줄 서서 올라간다..




아 ㅅㅂ 관둬.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던 중 멈추는 듯 싶던 비가 다시 세차게 내리면서 내가 우려했던 최악의 사태가 다가오고 말았다.
신발이 젖기 시작한 것이다.

산에 오르기 전 등산화를 살까.. 하면서도 돈도 없고 설마 비가 오겠나 싶어서 그냥 운동화를 신고 왔는데 정말로 비가 이렇게 와 버리니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한번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얼마 안가서 양말 속까지 흠뻑 젖어버렸고 나는 그제서야 지금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은 비부터 피하기로 하고, 다음 산장이 나올 때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지금은 일출이 문제가 아니라 죽고사는게 문제다.   

3200미터 지점에 있는 산장에 도착해 입구에서 기웃거리고 있으니 관리인이 다가와 1박에 5천엔이라며 숙박할 거 아니면 나가라고 한다. 헐.. 이런 일 있을 줄 모르고 돈을 얼마 안 가져 왔는데.. 지갑을 탈탈 털어보자 딱 천엔짜리 다섯장이 나온다. 숙박비를 지불하고 내게 남은 돈은 1엔짜리 몇개 뿐이었다.
돈은 돈대로 냈지만 위치가 위치인만큼 산장 시설이 좋을리 없어서 그냥 침낭 하나 던져주고 땡이었다. 일단 물기부터 좀 닦을 생각으로 배낭을 열어보자 갈아입으려고 가져온 양말이며 타올도 이미 물걸레가 된 뒤였다..




그저 웃음만


난방을 하는지 안하는지도 모를 산장 안에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고 있는데 새벽 4시 반 쯤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산하실 분들은 5시 15분부터 하산로를 안내할 테니 그때까지 준비해 주세요~'
잠도 못 잤고 사실 이때 쯤 정상은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느긋하게 있다가 내려가려고 했었는데, 관리자 말을 듣고보니 차라리 일찍 내려가서 거기서 쉬는게 낫겠다라는 생각에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체온으로 좀 마르지 않을까 싶었던 옷들은 여전히 젖어있는 채였다.

안되는 놈은 뭘해도 안된다는 성현들의 옛 말과 함께 인생을 비관하며 산을 내려가는데,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들어 뒷주머니를 만져보니 지갑이 없다.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만!! 쌍욕을 내뱉으며 다시 산장으로 돌아갔다. 내려왔던 길을 도로 올라가려니 두배로 힘들다.
산장에 도착해 관리자에게 지갑을 떨어뜨렸다고 하니 특별히 누가 맡기고 간 건 없다고 한다. 혹시 해서 잠자리의 침낭을 뒤져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돈은 한푼도 안 들어있었지만 각종 신분증이며 카드며 메이드카페 회원증이며..
좌절감에 사로잡혀 멍하니 있는데 어제 옆자리에 있던 할아버지가 들어오셨고 혹시나 해서 지갑에 대한 걸 여쭈었더니 좀 전에 본 것 같다며 침낭을 들춰 보이시는데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지갑은 딱 그 자리에 있었다. 할아버지께 거듭 감사인사를 드린 뒤 다시 하산로로 향했다. 이런 거지같은 산 다시는 오나 봐라.

그런데 산장을 나서자 구름이 싹 걷히고 해가 떠오르면서 눈 앞에는 지금까지 못 봤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완전히 포기했었던 정상정복에 대한 의욕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 때 시간이 5시 30분. 어떻게든 7시 반 까지 정상에 오른 뒤 8시에 내려오면 버스 출발 시간인 12시엔 맞출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와 놓고 패배자로 남을 순 업써!

마음을 굳히고 다시 방향을 돌려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오전 7시 8분 나는 드디어 후지산 정상을 밟고야 말았다.

3700미터라는 까마득한 높이에 서 있지만 햇볕이 내리쬐는 후지산 정상은 오히려 따뜻함마저 느낄 정도였다. 질릴 정도로 새파란 하늘과 발 아래 펼쳐진 운해는 장관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가 부족할 정도. 천국이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까? 도중에 포기 안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죽어서는 못 가볼테니.

정상정복 기념으로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전화가 터진다ㄷㄷ), 기념 사진을 찍은 뒤 8시 좀 넘어서 하산을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에 젖어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내려갈 때가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비록 정상에서 보진 못했지만 일출..




내려가다가 지갑 흘린거 알고 도로 올라왔다. 이게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그래 올라가자.




어제까지는 내가 저 구름 속에 있었다.










아 너무 멋지다.




까마득한 경사..




조금만 참아라 다 와 간다..




이쯤에서 산소캔을 막 들이켰는데 딱히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음




쉬어가던 도중에.




정신줄 놓기 일보직전




정상까지 200미터!




빨리 갑시다




도리이를 지나서.. 정상에 신사가 있다.




후지산 정ㅋ벅ㅋ




정상은 생각보다 넓찍하고 가게도 이것저것 놓여있다.




8월인데 얼음이 남아있다.




스포츠는 살아있다.




정말 머리 위에 하늘 밖에 없는 곳에 와 있다는 걸 실감.




구름 위의 산책




건너 편으로도 가보고 싶었는데 시간 관계상 가지 못했다. 사진으로 만족..




이제 하산



정상에 올랐어도 아직 못 가본 곳들이 있고 아쉬움이 남아있었지만 버스 시간이 4시간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하산길을 서두르기로 했다. 하산은 올라올 때와는 다른 길로 내려가는데 경사가 어마어마해서 한번 발을 내딛으면 신발이 쭉 미끄러졌다. (스틱이 없었으면 몇번은 바닥에 굴렀을 것이다.) 결국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5년 전 쯤에 조깅을 너무 무리하게 하다가 무릎이 상했는데 그 뒤로 관절을 많이 사용하는 운동을 하면 항상 무릎이 아팠다.
하루 정도 쉬면 나아지는데다 애초에 별로 운동을 안하기 때문에 병원에 가 보진 않았는데 통증이 여기서 도질 줄이야.. 올라올 때 차고 왔던 무릎 보호대는 비에 완전히 젖어서 산장에서 배낭에 넣어버린 뒤였다. 비를 죽입시다 비는 나의 원수.
뭐 무릎이 좀 아파도 쉬엄쉬엄 가면 괜찮은데 문제는 지금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픈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며 내려가고 있노라니 찢어진 우비를 펼쳐서 썰매처럼 타고 내려가고 싶은 충동이 마구 들었다.
 
내려가다 보니 두개의 갈림길이 나왔는데 후지 스바루라인 루트(富士スバルライン)와 스바시리구치 고고메(須走口五合目) 루트라는 이름이었다. 어 내가 왔던 후지산 고고메는 어디간거야? 당황해서 표지판 앞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왠지 스바시리구치 쪽이 고고메라는 이름도 그렇고 거리도 가까워서 솔깃했지만 촉박한 시간 속에서 한번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므로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한 김군에게 전화를 걸어 올바른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마침 연결된 김군이 인터넷을 통해 알아본 바, 버스 터미널이 있는 곳은 후지 스바루라인 쪽이라고 한다.

전화 찬스를 적절히 활용해 길을 알아낸 뒤 다시 내려오는 동안 어느새 구름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안경을 쓰고 있으면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서 볼 때 그렇게 멋지기만 하던 구름이 이제는 증오스럽다. 무릎은 여전히 아파서 절뚝절뚝 걸어가는데 이젠 아빠 따라온 초딩들도 날 추월해 간다. 불과 몇시간 전 정상에서 느꼈던 뿌듯함은 온데간데 없이 내가 왜 사서 개고생이지 하는 회의감만 머리 속에 가득한 걸 보니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다.





내려간다.






 이때만 해도 좋았지.




불도저가 여기까지 올라온다ㄷㄷ




아오 또 시작이야. 비 때문에 짜증나서 이 이후로 사진이 별로 없음.



그래도 무슨 일에도 끝은 있는 법이라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으며 내려오다 보니 자갈과 흙더미 밖에 없던 하산로는 풀로 무성해 지고 경사는 점점 완만해져 간다. 덕분에 무릎 통증도 조금은 가라앉아 스피드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앞서 날 추월해 갔던 초딩들을 다시 따돌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드디어 어제 밤 올라왔던 길이 나오기 시작했다.(거의 다 내려왔다는 뜻) 길 중간중간에 어제는 보이지 않았던 말이 몇마리 대기 중이었는데 돈을 내면 타고 내려갈 수 있는 모양이다. 너무 지치고 무릎이 아파서 당장 올라타고 싶었으나 난 땡전 한푼 없어서 지금까지 화장실도 못 가고 있다!

등산로 입구 쪽까지 거의 다 내려오니 웬 대학생들이 천막을 쳐놓고 후지산 환경에 대한 앙케이트 중이라면서 날 붙잡는데 혹시 돈받을까 봐 안가려고 하니까 그런거 아니라면서 물도 공짜로 준다고 한다.
앙케이트를 대충 작성한 뒤 '후지산 선수(富士山仙水)' 를 받아들고 어제 출발 했던 등산로 입구를 통과해 버스 터미널로 돌아왔다. 그때 시간이 11시 10분이 좀 안 되서였으니 3시간 만에 정상에서 내려온 셈이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터미널 부근의 가게들은 사람들로 꽉꽉 차있었고 버스가 올 때까지 어디 갈 데도 없었다.

12시가 되어 버스를 타고 신주쿠로 돌아왔다.
비에 곤죽이 된 버스표를 기사님께 건네고 버스에서 내리자 딴 세상 갔다온 것처럼 햇빛이 쨍쨍 맑은 날씨다. 하지만 너덜너덜한 무릎은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부터 하고 젖은 옷들을 세탁기에 집어 던진 뒤 두어시간 자고 일어나 김군과 술마시러 갔다. 후지산 갔다 와서 먹는 맥주는 정말 천국의 맥주였다.





말이 타고 싶긴 했는데, 나중에 보니 너무 느렸다. 말 탔으면 버스 놓쳤을 듯.




미리 싸들고 간 물도 남아서 집에 와서야 마셔봤다.




난 비가 정말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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